나의 이야기

가을유서

이충주 2019. 4. 18. 09:57



가을유서


류시화



가을엔 유서를 쓰리라

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이 노트 위에

마지막 눈 감은 새와 흰

눈껍풀 위에

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

한장의 유서를 쓰리라



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

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

하루밤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

나 유서를 쓰리라


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있는

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

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

고독한 시체 위에

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

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

가장먼곳에서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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