나의 이야기

자살

이충주 2019. 4. 18. 10:15


자살

류시화



눈을 깜박이는 것 마저

숨을 쉬는 것 마저

힘들 때가 있었다

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

자살을 꿈꾸곤 했다

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

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

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

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

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

그러나 나는 아직

당신 앞에

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


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

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

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

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

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

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

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

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

이불을 덮어 주고

큰곰별자리에둘러싸여 내 유서를

소리내어 읽으리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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